꿈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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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봉우리와 골짜기
cleven 434 2017-07-16 01:56:03
 
 

마태는 식민지의 세무원이었다. 식민지 주민들의 입장에서는 동족의 등을 쳐서 자신의 배를 불리는 매국노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런 그를 예수님이 부르시고 제자로 삼고자 하셨다. 그의 집에서 예수님을 위해 큰 잔치가 열렸는데 많은 세무원들과 죄인들도 동참했다. 그러자 바리새파 사람들이 어째서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 아울리느냐며 예수님을 공격했다. 예수님의 답변은 요새처럼 강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려고 왔다.' 예수님의 정체성과 사명감은 확고했다.

'예수님이 그곳을 떠나가시다가 마태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하시자 그가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마태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세무원과 죄인들도 많이 와서 자리를 같이하였다. 이것을 본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어째서 당신들의 선생은 세무원이나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오?' 하고 물었다. 예수님은 그 말을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사람에게만 의사가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나는 의로운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현대인의성경, 마태복음 9장 9-13절).

사람들은 온갖 지위, 자격, 조건을 내세우며 구별하고 차별하고 소외시킨다. 같은 사람인데도 누구는 귀족이 되고 누구는 천민이 된다. 함께 어울릴 수 없도록 울타리를 치고 담을 쌓고 문턱을 높인다. 그러나 새 나라의 킹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은 교만한 산봉우리를 평지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골짜기를 평지로 끌어올리신다. 예수님의 새 나라에는 귀족도 없고 천민도 없다. 잡범, 잡놈, 잡년, 잡것이 정상인으로 바뀐다.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마땅히 교회는 산봉우리를 낮추고 골짜기를 돋우어야 한다. 산봉우리를 만들지 말아야 하고 골짜기를 없애야 한다.

그런데 교회 성장의 미명 아래 조직되는 직능별 선교회는 교회 내의 산봉우리가 아닌가. 대형교회마다 어김없이 대학생 선교회, 교수 선교회, 기업인 선교회, 법조인 선교회, 의료인 선교회, 예술인 선교회 등이 가동되고 있다. 유능한 인재들이 대형교회로 쏠려 직능별 선교회가 조직된다는 것은 그만큼 산봉우리가 생긴다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직능별 선교회에 들기 어렵다. 하루하루 먹고살기도 힘든데 무슨 시간, 물질, 건강, 재능으로 직능별 선교회를 감당하겠는가. 교회의 직분을 얻기는커녕 교회의 변두리와 골짜기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날품을 팔아야 하는 사람들은 평일의 직능별 선교회 활동에 참여할 수 없다. 시간, 물질, 건강, 재능의 여유가 없다. 함께 모여 다과, 삶, 성경 구절, 기도 제목, 사역을 나눌 수 없다. 예수님의 모범과는 반대로 교회 내에서의 구별과 차별과 소외가 심화된다. '어째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난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합니까?'(현대인의성경, 고린도전서 11장 22절). 사도 바울은 유족한 사람들이 일찍 와서 자기들끼리 먼저 식사함으로써 가난한 사람들이 나중에 와서 먹지 못하는 상황에 대해 꾸짖는다. 당시에는 공동 식사를 하는 데 있어 구별과 차별과 소외가 있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거의 모든 영역에서 구별과 차별과 소외가 있다.

'그때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우리와 바리새파 사람들은 금식하는데 왜 선생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신랑의 친구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 때에는 그들이 금식할 것이다. 낡은 옷에 새 천 조각을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 이것은 기운 것이 그 옷을 잡아당겨 더 많이 찢어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 다 보존된다''(현대인의성경, 마태복음 9장 14-17절).

왜 금식하는가. 속죄하려고 금식하기도 하고 슬퍼서 금식하기도 하고 절박하게 기도하면서 금식하기도 한다. 예수님의 40일 금식처럼 대사를 앞두고 하는 금식도 있다. 금식에는 금식하는 사람의 결기가 오롯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는 금식도 있다.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당시 매주 2번의 금식은 경건한 모습을 보증하는 수표와도 같았다. 금식의 오남용 또는 타락이었다. 이제 예수님과 함께 시작된 새 나라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기준이 작동된다. 성전도, 안식일도, 금식도, 율법도 아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복음에 대한 긍정과 수용이 필요할 뿐이다.

예수님은 새 포도주로 오셨다. 새 포도주와 낡은 부대는 상극이다. 낡은 부대는 터지고 새 포도주는 쏟아진다. 성전이니, 안식일이니, 금식이니, 율법이니 주장하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반전과 파격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가. 새 포도주를 나무랄 수는 없다. 낡은 부대가 경신돼야만 한다. 하지만 묵은 포도주가 좋다며 낡은 부대에 계속 머물고 만다. 옛 기준만 고수한다면 낡은 부대다. 무슨 기준도 없이 살기에 수용성이 좋은 무지렁이들이 오히려 새 부대다. '내가 분명히 말해 둔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그 나라에 절대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현대인의성경, 누가복음 18장 17절). 이렇게 예수님의 새 나라에는 반전과 파격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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